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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13-10-10] 번호표만 뽑아주고 마냥 기다리게 하는… 말기癌 환자에게 멀고 먼 호스피스

미국은 癌사망자 65% 호스피스 병상서 여생 마치는데… 한국은 불과 12%

-호스피스 병상 턱없이 부족: 癌으로 年7만5000명 사망하는데 전국의 병상은 900개도 안돼… 복지부 "2020년까지 1400개 확보" 매달 100여명씩 대기환자 등록, 입원비 月수백만원 드는 곳도

-입원기한 두려운 환자·가족

"이번엔 또 어디로 옮기나… 아픈 몸 감당할 수나 있을까"

"환자분은 지금 방광암 말기입니다."

올 초 국립암센터 진료실에서 회사원 김진수(가명·54)씨가 들은 말이다. 한순간 멍했고 다음 순간 마음속에 폭풍이 휘몰아쳤다. 아이들, 아내, 부모, 회사, 죽음, 통증…. 항암 치료를 시작했지만 반년이 안 돼 암이 뼈에 번졌다. 극한의 고통이 밀려왔다. 의사가 "더는 어렵겠다"고 했다. 힘겹게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최소한 지금 겪는 통증에선 해방되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덜 아프게, 편안하게 가고 싶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김씨는 진짜 '벽'에 부딪혔다.

"죄송해요. 예약이 꽉 차 있어요."

어느 호스피스 시설에 전화를 걸건 "자리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한 해 암 사망자가 7만5000명인데, 호스피스 병상은 900개도 안 된다는 걸 김씨는 그때 처음 알았다. 지난 8월 간신히 서울 한 호스피스 병원에 자리가 났다. 대기 환자로 등록한 지 한 달 만이었다. 하지만 김씨는 그곳에서 4주 만에 나와야 했다. 병원 직원은 "대기 중인 분들이 너무 많아 4주 이상 계실 수 없다"고 했다.

말기 암 환자가 호스피스에 입원하면 평균 21일 만에 숨진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평균치다. 김씨처럼 기한을 넘기는 사람도 많다. 다행히 시내 다른 호스피스 병원에 자리가 났다. 김씨는 해골처럼 앙상한 몸으로 앰뷸런스에 탔다. 지난달 24일의 일이다.

전문가들은 "호스피스 병상이 절대 부족해 벌어지는 현상"이라고 했다. 이 분야 선진국인 영국 수준이 되려면 호스피스 병상이 2500개 필요하다. 싱가포르·대만 수준만 되려 해도 1200~1400병상이 있어야 한다. 더구나 고령화 진행에 따라 말기 암 환자는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다. 보건복지부는 8일 "2020년까지 전국 호스피스 병상을 1400개로 늘리겠다"고 했다. 윤영호 서울대 의대 교수는 "국민 수요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긴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지난달 서울 반포동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 말기 암 환자 23명이 1인실 7개, 4인실 4개에서 쉬고 있었다. 머리맡에 앉은 가족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간병인이 밀어주는 휠체어에 앉아 병동을 산책하기도 했다. 통증이 심한 사람은 진통제 링거를 맞았다. 의료진이 진통제 분량을 세심하게 체크했다. 보호자들이 환자 침상 밑에서 새우잠 자는 일반 병동과 달리 이 병동에는 보호자 전용 휴게실이 따로 있었다. 간병하다 지친 사람들이 잠깐씩 눈을 붙이고 갔다.

서울성모병원은 1988년 국내 최초로 호스피스 병동을 열었다. 한 해 평균 600여명이 입원하고, 하루 1~2명이 눈을 감는다. 비용은 만만치 않다. 간병인 쓰는 비용 빼고 입원비만 월 240만~1000만원(환자 본인 부담금 기준) 든다. 그래도 오겠다는 환자가 줄을 서 있다.

"'자리 있느냐'고 묻는 문의 전화가 하루 10통 넘게 와요. '도대체 언제쯤 들어갈 수 있느냐'고 따지는 보호자도 있어요. 매달 70~100명이 대기 환자로 등록해요."(라정란 서울성모병원 완화의료팀장)

하지만 대기한다고 자리가 다 나는 게 아니다. 호스피스 병동 병상 숫자가 23개뿐이기 때문이다. 병원 측은 "호스피스 병동은 일반 병동보다 인력도, 재원도 더 들어간다"면서 "수익을 생각하지 않고 운영하고 있지만 환자가 더 늘면 감당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 병원은 간호사 30여명이 말기 환자 집을 방문하는 '가정호스피스'도 운영 중이다. 이것도 포화 상태다.

◇암 사망자 8명 중 1명만 혜택

말기 환자 중에는 "하루라도 더 살고 싶다"는 사람도 있고 "편안히 가고 싶다"는 사람도 있다. 어느 쪽이 옳거나 그른 게 아니라 각자 원하는 방식대로 선택할 수 있으면 된다. 문제는 호스피스 시설이 워낙 부족한 데다 비용도 많이 든다는 점이다.

존엄한 기다림과 힘겨운 기다림 - 지난 7월 3일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대장암 말기 환자인 조양자씨가 생일을 맞아 가족이 연주하는 클래식 음악을 듣고 있다(위). 조씨는 마지막 소원이었던 가족 음악회를 마치고, 이틀 뒤 가족 품에서 숨졌다. 아래 사진은 서울 시내 또 다른 종합병원 중환자실에서 힘겹게 마지막 고통을 견디고 있는 말기 암 환자. /오종찬 기자, 서울성모병원 제공 미국은 호스피스 시설이 넉넉해 암 환자뿐 아니라 치매·중풍 환자도 호스피스 혜택을 본다. 지난해 기준 전체 사망자 10명 중 4명이 호스피스 시설에서 세상을 떠났다. 호스피스에서 숨진 사람 중에는 암 환자가 가장 많지만(37.7%) 치매(12.5%), 심장질환(11.4%), 호흡기질환(8.5%) 환자도 적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그럴 여유가 없어 통증이 심한 암 환자만 받아준다.

인구 3억명의 미국은 호스피스 '시설'만 5300개가 넘는다. 인구 5000만명의 한국은 호스피스 시설이 55곳뿐이다. 병상 수를 다 합쳐도 880개밖에 안 된다. 암 사망자 85명당 병상 1개꼴이다. 미국은 암 사망자 10명 중 6.5명이 호스피스에서 마지막 순간을 맞는데(65%·2011년 기준) 한국은 8명 중 1명 정도만 같은 혜택을 봤다(12%·2012년 기준).

◇말기 환자에게 "기한 찼으니 다른 데 가라"

밀려드는 환자를 감당하느라 일부 호스피스 시설은 '1인당 4주' '1인당 3개월' 하는 식으로 입원 기간에 제한을 둔다. 그 바람에 죽음을 한두 달 앞둔 말기 환자가 편안히 누울 자리를 찾아 한 시설에서 다른 시설로 앰뷸런스를 타고 옮겨다니는 일이 왕왕 벌어진다. 호스피스 전문가들은 "본인이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이라고 했다. "환자도 가족도 너무 힘들어해요. 시설을 옮기는 와중에 위독 상태에 빠지는 환자도 적지 않아요."(조성자 서울의료원 호스피스 병동 수간호사)

지난 5월 뇌암으로 아버지를 떠나 보낸 김석수(가명·30)씨가 바로 그런 경험을 했다. "애초에 호스피스에 있는 환자들은 말기 상태에서 입원하기 때문에 그 상태로 1~2개월 지나면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요. 가족도 '마음의 각오'를 하죠. 공교롭게도 환자들이 병원을 옮겨야 하는 게 대부분 바로 이때예요."

김씨의 아버지는 서울 모 호스피스 병원에 3개월간 누워 있다가 입원 기간 제한에 걸렸다. 다행히 인근 호스피스 병원에 자리가 났다. 이번엔 입원 기간 제한이 4주였다. 김씨의 아버지는 옮긴 병원에서 4주를 거의 꽉 채우고 사망했다. 김씨는 "기한이 다가오면서 '이번엔 또 어디로 옮기나' 싶어 다른 병원을 알아보는 중이었다"고 했다. "이렇게 편찮으신데 또 한 번 옮기면 '과연 감당하실 수 있을까' 싶었어요."

◇복지부 눈높이 vs 환자 눈높이

복지부는 억울해했다. "큰 틀에서 보면 호스피스 병상이 부족한 게 맞지만, 지금 있는 병상도 평균 10개 중 7개만 환자가 찬다"는 것이다. 일부 환자들이 호소하는 것만큼 열악한 상황이 아니라는 얘기다.

왜 이런 모순이 벌어질까. 환자들 입장에서 보면, 사랑하는 사람이 아플 때 최대한 좋은 곳에서 마지막 순간을 맞게 해주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이때 '좋은 곳'의 눈높이가 가족마다 다르다.

40대 주부 A씨는 "말기 암 남편을 위해 수도권의 여러 호스피스 시설을 둘러봤다"며 "시설이 좋은 곳은 병상이 꽉 찼고, 병상이 남는 곳은 '학교 양호실 수준'이었다. 시설 좋은 호스피스 병동에 자리가 나길 3주째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호스피스(Hospice) 완화의료

회복 가능성이 없는 말기 환자를 대상으로 통증과 증상을 조절해주는 의료 영역. 환자가 심리적 안정을 찾아 존엄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호스피스는 ‘나그네의 쉼터’라는 뜻으로, 유럽에서 수녀들이 말기 환자들을 돌본 것에서 유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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